들어가며
지난 토요일 한소네 7 시연회에 다녀왔습니다. 5년을 기다린 만큼 손끝에 닿는 감촉이 남달랐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다녀왔습니다 3. 한소네 7 설명회 - 엔지니어에게 듣는 속 깊은 이야기에 따로 전해드렸으니 찾아보셔도 좋겠습니다.
오늘로 접근성 브리핑이 제6호를 맞이합니다. 연구소를 설립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요, 이렇게 빨리 흐르는 시간 만큼 이번에도 다양한 소식들이 많았습니다. 이번 주는 법이 통과됐다는 소식부터 배상 없이 끝난 판결, 숫자로 보는 디지털 포용의 현주소, 그리고 바다 건너 시각장애인 대학원생의 3년 싸움까지 가볍지 않은 소식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래도 넷플릭스에서는 따뜻한 소식이 들어왔으니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제6호 - 2026년 4월 7일(화)
브리핑 1. 점자 교과서가 온다, 드디어 —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통과, 과제도 함께
지난 3월 31일 시각장애 학생과 교원을 위한 교과용 도서 적시 제공을 의무화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오래 기다려온 소식입니다. 하지만 환영의 목소리와 함께 현장의 아쉬움도 적지 않습니다.
이번 개정안의 골자는 두 가지입니다. 교육부장관과 교육감에게 시각장애 학생과 교원을 위한 교과용 도서가 ‘점자 등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학기 시작 전 적시에’ 제작·보급되도록 할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그리고 교과서 발행자가 디지털 파일을 30일 이내에 제출하도록 하는 납본 의무를 신설해 점역 작업의 출발점인 원본 파일 확보 문제를 제도적으로 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시각은 냉정합니다.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은 개정안을 환영하면서도 구조적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디지털 파일 납본 의무만으로는 적시 보급이 실현되기 어렵고 시각장애 교원을 위한 교사용 교과서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원안에 있던 ‘대체자료’라는 포괄적 개념이 삭제되고 ‘점자 등’이라는 열거적 표현에 머문 것도 확대교과서·전자점자·음성교과서 등 다양한 형태를 아우르지 못한다는 우려를 낳습니다.
이 문제의 무게는 한 교사의 이야기에서 더 선명하게 전해집니다. 서울 강동구의 한 중학교에서 16년째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시각장애 교사 김헌용 씨는 올해도 3월에 1~2단원 분권만 받아 든 채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AI와 디지털 교육에 쓰는 예산의 100분의 1만이라도 장애 학생과 교원을 위해 쓰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그의 말은 16년의 반복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법이 통과됐다는 것은 출발선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 법이 현장까지 닿으려면 대통령령 개정, 출판사 의무 강화, 교사용 교과서 체계 마련이 잇따라야 합니다. 16년의 반복을 끊는 실질적 첫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 시각장애인 교과서 접근권 ‘법적 보장’‥초·중등교육법 개정안 통과 환영 - 에이블뉴스
- 학기 시작 전 점자교과서 받는다…초중등교육법 개정안 본회의 통과 - 여성신문
- 3월인데 교과서가 없는 선생님…16년째 반복되는 시각장애 교사의 새 학기 - 미디어오늘
브리핑 2. “시각장애인이 직접 만드는 화면해설” — 넷플릭스, 전문 교육 과정 2년째
화면해설(Audio Description, AD)은 영상의 시각적 정보를 음성으로 설명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장면 전환, 인물의 표정과 행동, 자막 없이 흘러가는 정보들을 귀로 전달받을 수 있어 시각장애인의 영상 콘텐츠 접근에 없어서는 안 되는 기술인데요, 넷플릭스가 이 화면해설을 ‘시각장애인이 직접 만드는’ 방향으로 2년째 확대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는 오는 5월부터 국내 AD 제작 파트너사인 픽셀로직 코리아, 아이유노 코리아와 협력해 시각장애인 전문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지난해에는 감수자 6명을 양성하는 데 집중했는데 올해는 기존 ‘감수자 육성’ 과정에 ‘AD 나레이터’ 과정을 새로 추가해 투트랙 체계로 운영합니다. 6주 과정에 최대 6명을 선발하며 수료 후에는 실제 넷플릭스 콘텐츠 화면해설 작업에 직접 참여할 수 있습니다.
AD 나레이터 과정은 호흡·발성·발음·억양 등 기초 음성 훈련부터 장르별 나레이션 실습, 실제 화면해설 녹음까지 단계적으로 진행됩니다. 전 KBS 시각장애인 앵커 출신으로 현재 화면해설 나레이터로 활동 중인 허우령 아나운서가 강사로 참여합니다. 본격 교육에 앞서 4월 17일에는 국립서울맹학교 학생 및 교직원 100여 명을 대상으로 ‘내 목소리가 길이 될 수 있어’라는 주제로 멘토링 토크콘서트도 열립니다.
이 프로그램이 반가운 이유는 단순히 화면해설의 품질 향상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제4호에서 소개한 Lighthouse Guild AI의 선언처럼 장애 당사자가 기술의 테스터가 아닌 제작자로 서는 구조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감수’에 머물지 않고 ‘제작’으로 참여의 범위가 확장되는 이번 프로그램이 미디어 업계에서도 하나의 기준점이 되고 더 나아가 시각장애인의 새로운 직종으로 확립되길 기대합니다.
브리핑 3. “웹 접근성 미흡도 장애인 차별” — 대법원 첫 판단, 배상금은 인정되지 않아
온라인 쇼핑몰이 상품 이미지에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장애인 차별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습니다. 웹 접근성 문제를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로 명확히 다룬 첫 사례로 법조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중증 시각장애인들이 대형 온라인 쇼핑몰 플랫폼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및 차별구제 청구 소송입니다. 원고들은 상품 정보가 이미지 형태로만 제공되고 화면 읽기 프로그램으로 읽을 수 있는 대체 텍스트가 없거나 부족해 가격, 옵션 등 핵심 정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법원 제3부(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며 원심 판결을 유지했습니다. 재판부는 두 가지 법리를 함께 인정했습니다. 첫째, 형식적으로 모든 이용자에게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더라도 장애를 고려하지 않은 구조로 인해 특정 집단에 불리한 결과가 발생하면 ‘간접차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웹사이트 운영자는 시각 정보를 음성으로 변환할 수 있도록 대체 텍스트를 제공해야 한다는 ‘정당한 편의제공 의무’를 진다고 봤습니다. 나아가 개별 판매자가 상품 정보를 등록한 경우라도 그 정보를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플랫폼 사업자 역시 편의제공 의무를 부담한다고 판단해 책임 범위를 넓혔습니다.
그런데 위자료는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차별행위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피고가 고의 또는 과실이 없음을 입증한 경우에는 위자료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차별은 있었지만 배상은 없다’는 결론이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차별의 존재와 배상 책임을 구분한 이번 판결은 역설적으로 앞으로 ‘고의 또는 과실’을 입증하는 싸움으로 전선이 이동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 판결이 포털, 콘텐츠 플랫폼, 모바일 앱 등 디지털 서비스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브리핑 4. 숫자로 보는 디지털 포용 — 2025년 실태조사, 웹 접근성 70.4점 기록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3월 26일 ‘2025년 디지털 정보격차·웹 접근성·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매년 발표되는 이 조사는 우리 사회의 디지털 포용 수준을 계층별·분야별로 보여주는 기본 자료입니다. 세 가지 지표를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디지털 정보격차
장애인·고령층·저소득층·농어민 등 4대 취약계층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 대비 77.9%로 전년보다 0.4%p 오르며 5년 연속 개선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계층별로는 저소득층(97.0%)과 장애인(84.1%)이 상대적으로 높고 고령층(71.8%)이 가장 낮습니다. 그런데 이 수치 안에서 더 중요한 숫자가 있습니다. 스마트기기를 보유하고 있는지를 따지는 ‘접근’ 수준은 96.6%까지 올라왔지만 실제로 기기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를 나타내는 ‘역량’ 수준은 65.9%에 머물렀습니다. 기기는 있지만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격차가 30%p를 넘습니다. 기기를 보급하는 것과 디지털 역량을 키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이 격차가 말해줍니다.
웹 접근성
이용 빈도가 높은 8개 업종의 웹사이트 1,000개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전체 평균은 70.4점을 기록했습니다. 전년(66.7점) 대비 3.7점 상승으로 최근 5년 중 가장 큰 폭의 개선입니다. 업종별로는 금융·보험업이 79.0점으로 가장 높고 도매·소매업이 65.7점으로 가장 낮았습니다. 100점 만점에서 70.4점이 충분한 수준인지는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방향만큼은 제데로 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과의존
전체 위험군 비율은 22.7%로 2021년 24.2% 이후 5년 연속 내림세입니다. 다만 청소년(만 1019세)은 43.0%로 오히려 0.4%p 늘었고 유·아동(만 39세)도 26.0%로 소폭 증가했습니다. 숏폼 콘텐츠 확산과 생성형 AI 서비스 증가가 원인으로 분석됩니다.
브리핑 5. 권리를 얻으려면 직접 나서야 — ADA Title II 시행과 미국 시각장애 대학원생 이야기
제4호 브리핑에서 D-30이라고 소개했던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미국 법무부(DOJ)의 ADA1 Title II 디지털 접근성 규정이 4월 24일부터 인구 5만 명 이상의 주·지방정부 기관에 본격 적용됩니다. 이 기관들의 웹사이트와 모바일 앱, 디지털 포털이 WCAG 2.1 Level AA를 준수해야 합니다. 2
그런데 이 규정이 시행되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행정 절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NPR이3 최근 전한 한 이야기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미란다 레이시와 해롤드 로저스는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 온라인 사회복지 석사 과정에서 강의 자료 대부분이 화면 읽기 프로그램과 호환되지 않는 PDF로 제공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미지로만 된 도표, 레이블 없는 그래픽, 파일 제목 오류로 “misspell, misspell, misspell”을 반복하는 화면 읽기 프로그램의 음성… 두 사람은 3년간 학교 측에 편의를 요청했지만 로저스는 오히려 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결국 미국 시각장애인 연합회(NFB)와 함께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단지 안타까운 사례여서가 아닙니다. ADA Title II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의 재발을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UC 버클리의 ADA 담당관은 “연방 정부가 매년 와서 점검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차별을 겪는 장애인이 직접 나서야 하는 구조”라고 지적했습니다. 기준이 생겼다고 해서 현장이 자동으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한국도 이 이야기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번 주 브리핑에서 다룬 대법원 판결처럼 차별이 인정됐어도 배상을 받으려면 또다시 싸워야 했고 키오스크 접근성 기준 후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준이 생기는 것과 권리가 실현되는 것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 이것이 결국 접근성 운동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며
이번 주 소식들을 돌아보면 ‘법이 있다는 것’과 ‘권리가 실현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이야기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점자 교과서 법은 통과됐지만 현장의 구조는 아직 그대로이고, 웹 접근성 미준수가 차별임을 인정한 판결은 나왔지만 배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가 시각장애인에게 화면해설제작의 자리를 내어주고 웹 접근성 점수가 5년 연속으로 오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흐름입니다. 더디지만 세상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그 속도에 중요한 보탬이 된다고 저 알리는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저는 연구소를 운영하고 브리핑도 준비하겠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Footnotes
-
ADA(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미국 장애인법)는 1990년 제정된 연방 차별금지법으로, 고용·교통·공공시설·통신 등 공공 생활 전반에 걸쳐 장애인 차별을 금지합니다. Title II는 주 및 지방정부 기관에 적용되는 조항입니다. 이번 규정에서는 인구 5만 명 이상 공공기관은 2026년 4월 24일, 그 이하 규모는 2027년 4월 26일까지 WCAG 2.1 Level AA를 준수해야 합니다. | ADA Title II Web & Mobile Application Accessibility Rule - ADA.gov ↩
-
“계단이 휠체어 이용자를 정부 건물에서 배제할 수 있듯이, 접근하기 어려운 웹 콘텐츠와 모바일 앱은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배제할 수 있다.” — ADA Title II 디지털 접근성 규정 원문(Federal Register, 2024년 4월 24일 공포) | “Just as stairs can exclude people who use wheelchairs from accessing government buildings, inaccessible web content and mobile apps can exclude people with a range of disabilities.” | ADA Title II Web & Mobile Application Accessibility Rule - ADA.gov ↩
-
NPR(National Public Radio)은 1970년 설립된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 네트워크로, 독립적인 저널리즘과 심층 보도로 신뢰받는 매체입니다. 전국 약 1,000개 이상의 회원 방송국을 통해 뉴스, 시사,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디지털 미디어로도 폭넓게 서비스되고 있습니다. | National Public Radio (NPR) - Britannica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