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알리의 접근성 연구소가 문을 연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세상은 또 왜 그렇게 빨리 달려가는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네요. 하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속도에 집중하면서 무리하지 말기로 해요! 이번주에도 재밌는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제2호 - 2026년 3월 10일(화)

브리핑 1. 셀바스헬스케어, AI 점자정보단말기 ‘한소네 7’ 글로벌 출시

시각장애인의 생활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점자 정보 단말기한소네 7 출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한소네 6가 2021년에 출시되었으니 실로 5년 만의 신제품 출시인데요, 주목할 만한 점 두 가지만 짚어보겠습니다.

한소네 6에서는 별도의 앱을 설치하거나 웹 사이트에 접속해야 인공지능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한소네 7은 최신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를 도입하여 별도의 추가 설치 없이 Gemini를 바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말형 인공지능인 Gemini Nano를 탑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 연결이 없어도 문서 요약, 사물 인식 등이 가능하다고 하네요.

이번 한소네 7은 ‘지능형 점자 디스플레이’(ART)를 탑재했다고 하는데요, 단순히 점자를 표시하는 기능에서 더 나아가 ‘사용자의 점자 읽기 패턴과 손 끝 움직임을 인식하여 탐색 효율을 높이는 기술’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소네 6에서 아쉬웠던 자체 웹 브라우저와 모바일 스크린 리더 등의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보강되었을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프트웨어의 보강이 기존 한소네 6 사용자에게도 어느 만큼 적용될지도 관심입니다. 셀바스헬스케어는 오는 4월 제품 시연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추후 소식을 기다려 보면 좋겠습니다.


브리핑 2. 키오스크 접근성 의무 기준, 6가지에서 2가지로 축소 - 장애계 “기본권 후퇴” 반발

지난 브리핑 제1호 에서 [무인정보단말기] 관련 내용을 소개했는데요, 이번에는 그 배경이 되는 논란을 조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키오스크 접근성 편의 제공 의무 기준이 기존 6가지에서1 ‘과기부 검증기준 준수’와 ‘음성안내장치 설치’ 2가지로 대폭 줄었습니다. 50㎡ 미만 소규모 점포나 소상공인은 호출벨 설치만으로도 의무 이행이 인정됩니다. 정부는 소상공인 부담 완화와 현장 혼란 해소를 이유로 들었습니다.

장애계의 반발은 거셉니다. 2023년부터 3년간 단계적으로 배리어프리 키오스크를 도입하기로 약속해 놓고 정작 시행 직전에 기준을 후퇴시켰다는 것입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등 주요 단체들이 국정감사에서 이미 반대 의견을 냈음에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위헌 확인 소송 등 법적 대응을 예고했습니다.

시각장애 접근성 관점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은 ‘시각장애인용 구분 바닥재’가 의무 항목에서 빠진 것입니다. 구분 바닥재는 키오스크의 위치 자체를 인식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이것이 없으면 음성안내장치가 있더라도 해당 키오스크 앞에 도달하는 것부터가 문제 될 수 있습니다. 소상공인 부담이라는 논리가 완전히 틀리지는 않지만, ‘무엇을 먼저 양보할 것인가’를 정하는 과정에 당사자 관점이 충분히 반영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향후 법적 대응의 결과에 따라 시행령 효력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만큼, 계속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브리핑 3. 음향신호기, 이제 남은 보행 시간까지 알려준다 — 경찰청·도로교통공단 표준규격 개정

횡단보도 음향신호기 앞에서 리모컨을 누르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음성 안내가 나오지만 정작 한참 뒤에 신호가 바뀌어서 속상했던 적 있으셨나요? 이번에는 음향신호기 관련 소식입니다.

지난 1월 14일, 경찰청과 한국도로교통공단이 시각장애인 400여 명의 현장 평가 의견을 반영해 음향신호기 표준규격 개정안을 마련했습니다. 주요 변경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횡단 가능 잔여시간을 숫자로 음성 안내하는 기능 추가, 반경 5미터 내외에서만 버튼 위치를 알리는 근거리 안내 방식으로 전환, 야간 음량 자동 감소, 왕복 6차로 이상 도로에 건너편에서도 안내음을 인지할 수 있도록 마주보는 스피커(대향 스피커) 추가 설치 권고가 그것입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잔여시간 음성 안내 기능입니다.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신호가 바뀐 것을 알아도 ‘지금 건너면 안전한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남은 시간을 숫자로 알려주면 보행 판단에 실질적인 도움이 됩니다. 특히 넓은 교차로에서 중앙을 지나는 시점에 신호가 바뀌는 상황은 시각장애인에게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에, 이 기능의 의미는 작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개정이 경찰청 교통안전심의위원회에서 채택된 표준규격 수준이라는 점은 눈여겨봐야 합니다. 전국 확대와 실제 설치까지는 지방자치단체별 예산과 일정에 달려 있어, 개정안이 현장에 얼마나 빠르게 안착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지금이 두 달 후인데 아직 거리에 시간을 알려주는 신호등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진짜 지난한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브리핑 4. 세계 최대 보조기술 컨퍼런스, 41차 CSUN AT 컨퍼런스 2026

매년 봄, 접근성·보조공학기술 업계 사람들의 시선이 미국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으로 쏠립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노스리지(CSUN) 장애지원센터가 주최하는 보조공학기술 컨퍼런스가 바로 그 이유인데요. 올해로 41회를 맞이한 이 행사가 3월 9일부터 13일까지 애너하임 메리어트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350개 이상의 교육 세션과 125개 이상의 부스를 갖춘, 말 그대로 세계에서 가장 큰 보조공학기술 전문 컨퍼런스입니다.

올해 기조연설자는 Haley Moss입니다. 3살에 자폐스펙트럼장애 진단을 받았지만, 플로리다주 최초의 공개 자폐 당사자 변호사가2 된 인물로, 직장 내 포용성과 신경다양성 문제를 다루는 전문 연사이자 저술가입니다. 지난해 기조연설자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시청각장애인 인권 변호사 Haben Girma였던 것을 떠올리면, CSUN이 매년 장애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사회 변화를 이끄는 인물을 기조연설자로 내세운다는 일관된 방향성이 보입니다. ‘기술 전시회’에 그치지 않고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를 컨퍼런스 중심에 두려는 의도가 읽힙니다.

CSUN 컨퍼런스는 접근성 업계에서 단순한 행사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부터 작은 스타트업까지, 한 해의 접근성 관련 제품·서비스 방향을 이 자리에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LG전자·Dot의 점자 키오스크, Sony의 Best Buy 내 점자 디스플레이 등 굵직한 발표들이 이미 나왔고, 컨퍼런스가 진행 중인 만큼 주목할 만한 소식들이 계속 나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다음 브리핑에서 이 중 몇 가지를 골라 소개할 예정입니다.


브리핑 5. “화면이 제품이 아니라 지능이 제품이다” - Agentic AI 시대, 시각장애인에게 유리한 전환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요즘 자주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인터페이스는 더 이상 제품이 아니다. 지능이 제품이다(The interface is no longer the product. Intelligence is).” AI 에이전트와 CLI|명령줄 인터페이스]3 기반 도구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사용자가 화면을 직접 탐색하는 대신 목표를 말하면 에이전트가 알아서 실행하는 방식으로 소프트웨어 패러다임이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수십 년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는 사람의 인지 방식에 맞춰 ‘화면을 보고, 클릭하고, 탐색하는’ 흐름으로 설계됐습니다. 그런데 에이전트 시대에는 이 흐름 자체가 해체되고 있습니다.

접근성 관점에서 이 전환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GUI 중심의 소프트웨어 세계는 태생적으로 시각 중심이었습니다. 아이콘, 색상 코딩, 시각적 위계, 드래그앤드롭… 이 모든 요소는 시각이 있는 사용자를 기준으로 설계됐고, 시각장애인화면 읽기 프로그램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그 세계에 ‘끼어드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습니다. 접근성은 항상 주된 설계 후의 추가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Agentic AI에서는 상황이 역전됩니다.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의도(intent)가 상호작용의 출발점이 되고, 그 의도는 언어로 전달됩니다. 화면을 볼 필요가 없고, 탐색 구조를 익힐 필요도 없습니다. 접근성 우회로가 필요 없는, 처음부터 언어 기반으로 설계된 세계입니다. 지난번 WebMCP - 웹 접근성의 판도를 바꿀 기술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물론 낙관만 하기는 이릅니다. 에이전트가 작업 결과를 시각적 대시보드나 차트로 제시하거나, “확인하려면 화면을 보세요” 식의 피드백을 줄 경우 다시 시각 의존 구조로 돌아갑니다. 에이전트 시대의 접근성은 “화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화면 없이도 작동하는 설계를 기본값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전환이 실제 접근성의 진전으로 이어지려면, 에이전트의 출력과 피드백 방식 자체가 처음부터 비시각적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담론은 이미 바뀌고 있습니다. 설계의 기본값도 함께 바뀔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발자 커뮤니티에 CLI와 접근성 관련된 담론이 나올 수 있도록 저도 공부하고 노력하겠습니다.


마치며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처럼 접근성 측면에도 점점 나아지는 기술과 제품이 있는가 하면, 아직 갈 길이 먼 지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함께한다면 점점 더 ‘누구나 닿을 수 있는 세상’이 가까워지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의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Footnotes

  1. 과기부 검증기준 준수, 휠체어 접근성, 시각장애인용 구분 바닥재, 점자블록 또는 음성안내장치, 수어·문자·음성 지원, 장애인 이용안내문 게시.

  2. ‘공개 자폐 당사자 변호사’는 Moss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openly autistic attorney”를 옮긴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인격 우선(Person-first) 표현을 권장해 왔으나, 자폐 커뮤니티 일부에서는 자폐를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정체성 우선(Identity-first) 표현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기도 합니다. ‘공개(openly)‘라는 표현은 당사자가 자신의 진단 사실을 밝히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주체임을 드러냅니다. | Person-First vs. Identity-First Language

  3. Command Line Interface. CLI. 90년대에 주로 사용했던 ‘DOS창’을 떠올릴 수 있는 분이라면 CLI가 매우 익숙하실 텐데요, 키보드를 이용해서 명령이나 메뉴를 선택하고 출력 결과를 받아보는 방식의 환경입니다. 이미 Claude Code, Codex, Gemini CLI인공지능을 활용하시는 분들도 점점 더 많이 이용하고 있으며, 비교적 시각장애인에게도 친화적인 환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