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꽃샘추위가 한두 번 더 찾아올 테지만 그래도 세상이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다는 건 분명하겠지요. 이번 주 접근성 브리핑도 그 온기를 닮은 소식들로 채워봤습니다. 국내에서는 오래 기다려온 공간이 드디어 문을 열었고, 바다 건너에서는 시각장애인 마라토너가 뉴욕 도심 13마일을 달렸습니다. 이번 주의 소식을 배달하겠습니다!
제4호 - 2026년 3월 24일(화)
브리핑 1. 단차 없는 공간, 경계 없는 일상 — 서울 ‘어울림플라자’ 개관
지난주 화요일에 뉴스를 찾아보다가 제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소식을 찾았습니다. 3월 18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전국 최초 배리어프리 복지문화복합시설 ‘어울림플라자’가 정식 개관했습니다. 총 1,278억 원이 투입된 지하 4층·지상 5층, 연면적 2만 3,915㎡ 규모의 이 시설은 이름 그대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눈에 띄는 점은 건물 전체에 단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우리 주변의 공공시설 가운데 이 ‘당연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킨 곳이 얼마나 될까요. 체력단련실에는 전동 휠체어 이용자도 사용할 수 있는 배리어프리 운동기구가 갖춰졌고, 수영장에는 수중 휠체어가 배치돼 수중 경사를 완만하게 조성했습니다. 도서관에는 점자도서 460점과 점자 라벨 도서, 소리 나는 책이 비치됐습니다.
시각장애인 관점에서 반가운 것은 청각보조장비 ‘텔레코일1 존’과 점자안내판, 음성유도기입니다. 텔레코일 존은 보청기·인공와우 이용자가 주변 소음 없이 안내 방송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시각·청각 모두 챙긴 설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5층에는 서울대 치과병원이 운영하는 ‘서부장애인치과병원’이 입주해 장애 유형·등급·나이 구분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4월 1일부터 본격 진료를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이 시설의 철학이 마음에 드는 점이라면 장애인만을 위한 ‘특수 시설’이 아니라 비장애인도 함께 수영하고, 함께 책을 읽고, 함께 공연을 보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개관 전부터 인근 특수학급·특수학교 학생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 전시했다는 도서관장의 말처럼, 이 공간은 준비 과정부터 경계를 허물려 했습니다. ‘전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랑이 아니라, 하루빨리 ‘전국 각지’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전 예약 후 ‘동행크루’가 지하철역·버스 정류장에서 시설까지 이동을 지원해준다고 하니, 서울에 계신 분들은 봄나들이 삼아 한번 방문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브리핑 2. “한계는 눈에 있지 않다” — Lighthouse Guild AI 출범, 시각장애 CEO의 하프마라톤
뉴욕에서 날아온 이야기입니다. 3월 15일, 토머스 패닉(Thomas Panek) 씨가 뉴욕 하프마라톤 ‘United Airlines NYC Half’를 완주했습니다. 그런데 보통의 완주 소식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인 그는 메타(Meta)와 공동 개발한 AI 안경을 착용하고, 13.1마일(약 21km)의 뉴욕 도심 코스를 달렸습니다.
AI 안경은 달리는 내내 그에게 전방의 물 보급소 위치를 알려주고, 결승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안내했습니다. 울트라마라톤 선수 스콧 주렉(Scott Jurek)은 AI 안경을 통해 패닉의 시점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무선으로 코칭을 전달했습니다. 패닉은 완주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시작선에 설 때마다 사람들로부터 제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승선에 닿기 전에 그 위치를 알았습니다.”
이 완주와 함께 3월 17일, 패닉이 이끄는 Lighthouse Guild는 ‘Lighthouse Guild AI(LGAI)‘라는 새 부서 출범을 발표했습니다.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시각장애인을 기술의 ‘테스터’가 아닌 ‘공동 개발자’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메타는 LGAI의 첫 번째 공식 파트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접근성 분야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한 것을 결정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2 LGAI의 선언은 바로 이 원칙을 기술 개발 현장에 적용하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장애 당사자가 처음부터 설계 테이블에 앉아야 진짜 필요한 기술이 나온다는 것은 지난 번 브리핑의 K-Braille 이야기에서도 이미 말씀드린 바 있죠.
물론 메타와의 파트너십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AI 안경 기술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각장애인에게 닿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하지만 뉴욕 도심 21킬로미터를 달린 한 사람의 이야기는 보조공학의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않을까요?
브리핑 3. 웹 접근성 표준의 다음 세대 — WCAG 3.0 3월 워킹드래프트
이번 브리핑에서는 조금 기술적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웹 접근성 표준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 WCAG(Web Content Accessibility Guidelines, 웹 콘텐츠 접근성 지침)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의 법·제도에서 기준으로 삼고 있는 WCAG 2.1 혹은 2.2의 다음 버전, 바로 WCAG 3.0의 3월 워킹드래프트(작업 초안)가 3월 3일 공개됐습니다.
W3C 접근성 가이드라인 워킹그룹(AGWG)은 이번 업데이트를 “표준이 처음 제안된 이래 가장 구조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라고 표현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기존의 ‘아웃컴(outcomes)‘이라는 용어가 ‘요건(requirements)‘으로 바뀌었고, ‘가이드라인’은 사용자 중심의 결과 문장으로 재작성됐습니다. 둘째, 처음으로 ‘적합성 모델(conformance model)‘의 초안이 포함됐습니다. WCAG 2.x의 A / AA / AAA 단계를 대체할 새 평가 체계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W3C는 현재 대부분의 요건이 ‘개발 중(Developing)’ 상태로 아직 최종 확정이 아니며, WCAG 3.0의 완성은 빨라도 2028년 이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4월까지 구체적인 로드맵도 공개할 예정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WCAG 3.0은 웹 콘텐츠를 넘어 앱, 저작 도구, 보조기술, IoT 기기, 가상·증강현실까지 아우르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습니다. 이름도 ‘Web Content Accessibility Guidelines’에서 ‘W3C Accessibility Guidelines’로 바뀌었습니다. 화면 읽기 프로그램이 앱과 스마트 기기를 넘나드는 오늘날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확장이 반가운 것은 분명합니다.
아직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국제 표준은 제정되고 나면 각국의 법·제도에 반영되기까지 또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 WCAG 3.0이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갖는 것이 나중에 우리나라 웹 접근성 기준이 어떻게 바뀔지 미리 읽어두는 일이기도 합니다.
브리핑 4. 미국 공공 웹사이트 접근성 의무화, D-30 — ADA Title II 디지털 접근성 규정 시행
4월 26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날짜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 법무부(DOJ)가 2024년 확정한 ADA(미국 장애인법) Title II 3 디지털 접근성 규정이 처음으로 시행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인구 5만 명 이상의 주·지방정부 기관은 이 날부터 웹사이트, 모바일 앱, 디지털 포털이 WCAG 2.1 Level AA를 준수해야 합니다. 더 작은 지방정부와 특수행정구역은 2027년 4월까지 적용됩니다.
겉으로 보면 미국 공공기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소식을 브리핑에 담았을까요? 미국처럼 거대한 시장에서 특정 디지털 접근성 기준이 법적 의무로 확정될 때, 그 영향은 미국 내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소프트웨어·플랫폼 기업들은 미국 공공기관의 기준에 맞춰 제품을 수정하게 되고, 그 변화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서비스에도 스며듭니다.
더불어 ADA Title II를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 규정은 접근성 소송의 판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웹 접근성 관련 소송의 근거가 주마다 달랐지만, 연방 기준이 명확해지면 집행이 강화됩니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서는 접근성 소송에서 ‘금전 합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례가 나오고 있고, 규제 당국도 실질적인 개선 없는 합의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우리나라도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관련 기준이 있지만, 실제 집행력과 제도 안착 속도는 여전히 과제입니다. 키오스크 접근성 기준 후퇴 논란이 그 단적인 예이지요. 미국에서 이 기준이 어떻게 현장에 안착하는지 관찰하는 것이 우리 제도 개선에도 참고가 될 것입니다.
- New Digital Accessibility Requirements in 2026 - bbklaw.com
- This Week in Accessibility - BlindSpot Solutions
브리핑 5. 국내 최초 ‘게임 접근성 가이드라인’ 탄생 — 이제 게임사도 접근성을 설계한다
제1호 브리핑에서 시각장애인 게임 길드 ‘오토핀사운드’가 블리자드에 접근성 개선 제안서를 전달할 예정이라고 소개했었지요. 그 이야기와 맥락이 닿아 있는 소식을 하나 더 전합니다. 시간은 조금 지났지만 놓치기 아까운 내용입니다.
지난해 10월 21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이 국내 최초의 ‘게임 접근성 가이드라인’을 공개했습니다. 2021년 개정된 콘텐츠산업진흥법 제26조의 장애인 콘텐츠 접근권 보장 조항을 근거로, 2022년부터 3년간 연구를 진행하고 게임 업계·학계·장애인단체와 협의를 거쳐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가이드라인의 구성은 시각·청각·운동·인지, 이렇게 네 가지 장애 유형별로 되어 있습니다. 플랫폼별·장애 유형별로 어떤 기능이 필요한지, 실제 개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시각 자료와 함께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추상적인 선언문이 아니라 개발자가 바로 참고하여 쓸 수 있는 ‘작업 지침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릅니다.
정책적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도 눈에 띕니다. 2026년부터 콘진원 지원사업에 신청하는 게임사가 이 가이드라인을 적용한 경우 가산점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당장 의무는 아니지만 지원을 받으려면 접근성을 신경 써야 한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내는 것입니다. 또한 게임인재원·한국콘텐츠아카데미 교육과정에도 해당 내용을 반영하기로 했으니 이제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이 접근성을 처음부터 배우는 구조가 마련된 셈입니다.
물론 가이드라인 하나로 하루아침에 현장이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내 게임의 경우 지금까지 색약 모드를 지원하는 정도가 대부분이었고 시각장애인이 귀로 플레이할 수 있는 환경은 아직 요원합니다. 오토핀사운드 길드원들이 던전 안에서 음성 내비게이션이 꺼져버리는 불편을 몸으로 겪으면서 블리자드에 개선을 요청하고 있는 현실과 정부 가이드라인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빨리 좁혀질지가 진짜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이드라인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기준이 생겨야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할 수 있어야 바꿀 수 있습니다. 게임이 국민의 절반 이상이 즐기는4 대중문화가 된 지금, ‘게임할 권리’도 접근성의 의제가 된다는 사실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것, 그 자체가 출발점입니다.
마치며
어울림플라자가 문을 열었고, 뉴욕에서는 시각장애인이 AI 안경을 쓰고 마라톤을 완주했습니다. 웹 표준의 다음 세대가 윤곽을 드러내고, 세계 최대 시장의 디지털 접근성 의무화 시계도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게임이라는 문화 공간에도 비로소 ‘모두를 위한 설계’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멀리서 보면 세상이 조금씩은 나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함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면 그 변화의 속도를 조금은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요?
늘 그렇듯, 여러분의 피드백이 접근성 브리핑을 만들어 갑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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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코일(Telecoil, T-코일)은 보청기나 인공와우 내부에 내장된 작은 코일입니다. 공간 바닥이나 벽 둘레에 설치된 구리선 루프(hearing loop)에 전류가 흐르면 전자기장이 생성되는데, 텔레코일이 이 신호를 수신해 소리로 변환합니다. 사용자가 보청기를 ‘T 모드’로 전환하면 마이크로폰이 비활성화되면서 주변 소음은 차단되고, 루프에서 직접 전달된 소리만 또렷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극장·회의실·공공시설 등에 설치되며, 텔레코일 적용 공간임을 나타내는 국제 표준 표시(파란 귀 모양에 ‘T’ 문자)가 있는 곳에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 소음 가득한 세상, 난청인을 위한 ‘청각 보조 기술’의 진화와 미래 - 캐어유 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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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Nihil de nobis, sine nobis(우리 없이 우리에 대한 것은 없다)에서 유래한 이 구호는 1505년 폴란드 의회의 헌법 제정 과정에서 처음 사용됐습니다. 영어 형태로 장애인 권리운동에 본격 확산된 것은 1990년대로, 미국의 장애인 권리 활동가 제임스 찰튼(James Charlton)이 1993년 남아프리카에서 Disabled People South Africa의 활동가들로부터 처음 들었으며, 1998년 같은 제목의 저서 Nothing About Us Without Us: Disability Oppression and Empowerment를 출판하며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후 2006년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 제정 과정에서 장애 당사자 단체들의 직접 참여를 이끄는 핵심 원칙으로 자리잡았습니다. | Nothing about us without us - Wikipe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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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미국 장애인법)는 1990년 제정된 연방 차별금지법으로, 고용·교통·공공시설·통신 등 공공 생활 전반에 걸쳐 장애인 차별을 금지합니다. Title II는 그 중 주(州) 및 지방정부 기관에 적용되는 조항으로, 정부가 제공하는 모든 프로그램·서비스·활동에서 장애인 차별을 금지합니다. 2024년 미국 법무부(DOJ)는 Title II 시행령을 개정해 디지털 접근성 기준을 명시적으로 포함시켰으며, 인구 5만 명 이상의 공공기관은 2026년 4월 26일부터 웹사이트·모바일 앱 등이 WCAG 2.1 Level AA를 준수해야 합니다. | ADA Title II Web & Mobile Application Accessibility Rule - ADA.go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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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게임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게임 이용률은 2021년 71.3%, 2022년 74.4%로 정점에 달했으나, 이후 하락세를 보여 2024년 59.9%, 2025년 50.2%로 집계됐습니다. | 2025 게임이용자 실태조사 - 한국콘텐츠진흥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