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벌써 4월도 절반을 향해 달려가고 접근성 브리핑도 제7호째입니다. 봄이 깊어지는 만큼 세상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는데요, 이번 주는 유독 ‘법’과 ‘권리’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싸움’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대법원 판결이 지난 호에서 다룬 그 자리에서 한 발 더 나아갔고, 바로 며칠 전 통과된 점자교과서 법이 벌써 규탄 성명을 맞닥뜨렸습니다. 한편으로는 제5호에서 소개했던 국회 접근성 컨퍼런스가 무사히 열렸고, 해외에서는 한 시각장애 청년이 레고 블록 위에 쌓아 올린 따뜻한 이야기가 날아들었습니다. 무거움과 따스함이 교차하는 제7호, 지금 시작합니다.

제7호 - 2026년 4월 14일(화)

브리핑 1. “차별은 있는데 벌은 없다” — 시각장애인 웹접근성 대법 판결, 재판소원으로!

지난 호 브리핑 3번에서 소개한 대법원 판결 기억하시나요? 웹 접근성 미흡도 장애인 차별에 해당한다는 첫 판단은 나왔지만 위자료는 인정되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그 이야기가 한 주 만에 다음 장으로 넘어갔습니다.

4월 13일 오후,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와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등은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대법원 확정판결에 대한 ‘재판소원’을 청구했습니다. 재판소원은 확정된 법원 판결 그 자체를 직접 헌법소원의 대상으로 삼는 제도인데요, 2026년 3월 12일 헌법재판소법이 개정되면서 비로소 가능해진 길입니다. 이번 사건은 그 새 제도를 활용한 초기 사례 중 하나가 됐습니다.

재판소원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최상민 씨는 활동가의 대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법원은 차별로 인해 10년 가까이 일상에서 배제되고 소외됐던 우리의 고통, 그 위자료는 0원이라고 판단했다. 죄는 있는데 벌은 없다는 것이 사법부가 말하는 정의인가 묻고 싶다.” 이어서 “이는 시각장애인들을 대한민국의 정당한 소비자로,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은 “차별 피해자 손해배상 등 실질적 구제가 없다면 기본권 보장은 선언에 그칠 뿐”이라며 “헌재가 이 점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사건이 지닌 무게는 숫자에서 드러납니다. 2017년 963명의 시각장애인 원고가 지마켓·SSG닷컴·롯데쇼핑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 9년 만에 도달한 결말이 “차별은 인정하되 배상은 없다”였으니까요. 1심은 1인당 10만 원의 위자료를 인정했지만 2심이 이를 취소했고 대법원은 그 판단을 유지했습니다. 재판부는 이미지를 텍스트로 구현하는 기술 수준과 판매자들의 협력을 끌어내기 어려운 현실 등을 이유로 ‘고의·과실’을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연구소가 주목하는 지점은 이겁니다. 대법원이 웹 접근성 의무의 방향을 분명히 한 것은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권리가 침해된 당사자에게는 실질적 회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간극이 그대로 남았다는 점이요. 이 간극을 메우는 데 새로 열린 재판소원의 길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 헌법재판소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앞으로 긴 호흡으로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브리핑 2. “법은 통과됐지만 본질은 외면됐다” — 한시련, 초·중등교육법 개정 규탄 성명

제6호 브리핑 1번에서 소개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기억하실 겁니다. 시각장애 학생을 위한 교과용 도서 적시 제공을 의무화하는 내용으로 3월 3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었지요. 그때 저는 ‘출발선이 바뀌었다’고 썼지만 현장의 온도는 예상보다 더 차갑습니다.

4월 9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점자교과서 문제 본질 외면한 초·중등교육법 개정 규탄’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헌법소원 추진 방침까지 밝혔습니다. 그 이유를 짚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이번 개정안에는 점자교과서에 교과서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이 빠졌습니다. 둘째, 시각장애 학생에게 ‘학기 시작 전’과 같은 구체적 제공 기한이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셋째, 시각장애 교원을 위한 교사용 교과서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넷째, 확대교과서·전자점자·음성교과서 등 다양한 형태를 포괄하는 ‘대체자료’ 개념이 원안에서 빠지고 ‘점자 등’이라는 열거적 표현에 머물렀습니다.

숫자를 하나 더 짚겠습니다. 국립특수교육원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시각장애 학생용 교과서 대체자료 5,437부 중 47.1%가 통권이 아닌 분권 형태로 지급됐다고 합니다1. 교과서가 제때 통째로 오지 않고 쪼개져서 뒤늦게 오는 현실, 그것이 바로 지난 호에서 소개한 김헌용 교사의 ‘16년의 반복’이 숫자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당사자 단체가 법 통과 9일 만에 규탄 성명을 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이 개정안이 현장의 실질적 변화로 이어지기에는 부족했다는 목소리가 크다는 뜻이지요. 법 제정의 의미를 평가절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출발선’에서 멈추지 않고 ‘결승선’으로 가는 작업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하위법령 개정과 교사용 교과서 체계 마련, 그리고 대체자료 범위 확대, 이 세 가지가 앞으로의 과제가 되겠습니다.


브리핑 3. 숫자로 보는 시각장애인 편의시설 — 공공의료기관 적정 설치율 30%대

지난 호 브리핑 4번에서 디지털 포용 실태조사로 숫자를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물리적 공간의 숫자를 보겠습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가 4월 8일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로, 2025년 5월부터 9월까지 약 5개월간 전국 111개 공공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시각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현황을 점검한 내용입니다. 조사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과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진행됐습니다.

결과는 씁쓸합니다. 점자블록과 점자표지판 등 주요 편의시설 ‘1만 728개 중 적정 설치율은 30.1%에 그쳤습니다. 미설치 비율이 53.3%, 부적정 설치가 16.6%로 나타났습니다. 시설별로 더 들어가면 점자블록 총 2,814개 중 41.0%만 적정하게 설치됐고 점자표지판은 7,692개 가운데 26.0%만 기준을 충족했습니다. 점자안내판과 음성안내장치 역시 적정 설치율이 36.9%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기기 중 상당수는 설치되어 있을 뿐 실제 시각장애인이 이용하기에는 무용지물이거나 제 역할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숫자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맥락에 있습니다. 공공의료기관은 모두가 언젠가 찾아야 하는 공간이지요. 건강 문제가 생겼을 때 찾는 병원에서 입구의 점자블록이 어긋나 있거나 수도꼭지 냉온수 점자가 잘못 붙어 있으면 이것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의료 접근권 자체가 흔들리는 문제가 됩니다. 브리핑 1번에서 대법원이 쇼핑몰의 대체 텍스트에 대해 판단했듯이, 이런 물리적 편의시설 문제도 ‘동등한 접근’이라는 헌법적 가치의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김재룡 한시련 회장은 “공공의료기관의 보행 접근성과 이용 편의성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번 조사는 앞으로 지자체별·기관별 개선 노력을 점검하는 기준점이 될 것 같습니다. 저 알리도 앞으로 다음 해에 이 숫자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브리핑에서 계속 추적해 보겠습니다.


브리핑 4. 국회에 모인 사용자 중심의 접근성 — 김예지 의원 컨퍼런스 성료

제5호 브리핑 3번에서 기대를 담아 소개했던 그 컨퍼런스가 실제로 열렸습니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이 주최한 「사용자 중심의 장애인 접근성 컨퍼런스」는 4월 10일 오후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예정대로 진행되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일산직업능력개발원,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웹와치가 주관을, 보건복지부·과기정통부·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등이 후원을 맡았습니다.

이 자리의 무게감을 보여 주는 것은 참석자 명단입니다. 정부 부처와 함께 삼성전자·LG전자·카카오 등 국내 IT 리딩 기업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책·제도, 기업 사례, 신기술 기반 보조공학기술 방향을 함께 논의했습니다. 카카오의 김혜일 DAO, LG전자의 접근성 키오스크 이야기 등 저 알리가 브리핑에서 여러 차례 소개한 이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저도 현장에 참석해사 많이 배우고 느끼고 왔습니다.

무엇보다 컨퍼런스를 관통한 메시지가 선명했습니다. 김예지 의원은 “접근성은 기술 개발 이후에 덧붙이는 보완책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려되어야 할 당연한 권리”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문장은 제2호에서 짚은 Agentic AI 시대의 접근성 담론제4호에서 다룬 Lighthouse Guild AI의 “당사자가 공동 개발자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나중에 덧붙이는 보완책’에서 ‘처음부터 설계에 들어가는 권리’로, 접근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컨퍼런스 한 번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정책 입안자와 기업과 당사자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 ‘AI 시대의 접근성’을 구체적인 사례로 이야기 나누었다는 것 자체가 2026년 봄 접근성 담론의 체감 온도를 보여 줍니다. 이번 논의에서 나온 제언들이 실제 입법과 제도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기업들의 실제 제품에 언제쯤 반영되는지를 앞으로 추적해 보는 것이 저의 몫이겠습니다.


브리핑 5. 손끝으로 쌓아 올린 4,000조각의 세계 — ‘Bricks for the Blind’와 매튜 시프린 이야기

이번 주 따뜻한 소식은 미국에서 왔습니다. AP 통신이 4월 6일자로 송고한 특집 기사가 워싱턴 타임스·Entrepreneur·WBUR 등 굵직한 매체로 퍼져 나갔는데요, 읽다가 저 알리의 코끝이 괜히 시큰해져서 여러분께 꼭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주인공은 매사추세츠주 뉴턴에 사는 28세 청년 ‘매튜 시프린(Matthew Shifrin). 그는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어린 시절부터 레고를 좋아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레고 조립 설명서는 그림으로만 되어 있어서 시각장애인에게는 ‘완전히 쓸모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이나 친구 손을 빌려야 겨우 한 세트를 완성할 수 있었고, 때로는 차 한잔으로 회유해 친구를 집으로 불러야 했다고 합니다.

그가 13살이 되던 해,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베이비시터이자 가족의 오랜 친구였던 ‘릴리야 핀켈(Lilya Finkel)‘이 두꺼운 바인더 하나를 건넸습니다. 거기에는 중동식 궁전 레고 세트를 조립할 수 있는 점자 설명서가 한 장 한 장 들어 있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최초의 접근 가능한 레고 설명서’였죠. 매튜의 회상입니다. “그날 처음으로 혼자 힘으로 레고를 완성했어요. 조립하는 전 과정을 제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었고, 주변 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핀켈 씨가 세상을 떠난 뒤 매튜는 그녀를 기리며 두 사람이 함께 만들었던 설명서들을 다듬어 온라인에 올리기 시작했고, 2023년 비영리 단체 ‘Bricks for the Blind’를 정식으로 출범시켰습니다2. 지금은 시각장애가 없는 작가 30명과 시각장애 테스터 10여 명으로 구성된 팀이 꾸려져 있고, 웹사이트에서 누구나 무료로 설명서를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점자로 출력하거나 점자 정보 단말기로 읽거나 화면 읽기 프로그램으로 들을 수 있지요. 지금까지 100조각짜리 자동차부터 4,000조각짜리 다리까지 540개 이상의 레고 세트가 변환됐고, 미국부터 호주까지 약 3,000명이 이 설명서로 레고를 쌓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파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매튜는 2017년 직접 덴마크 레고 그룹 본사를 찾아가 제품의 접근성을 높여 달라고 제안했고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2019년 레고가 공식 오디오·점자 조립 설명서를 출시했습니다. 2020년에는 Lego Braille Bricks(점자 블록)가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로 정식 발매되어 시각장애 아동이 알파벳과 숫자를 블록으로 배울 수 있게 됐고요. 레고 세트 안에 시각장애 캐릭터 미니피규어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명의 당사자가 밀어낸 문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난감 브랜드의 설계 철학 자체를 조금씩 바꾸고 있는 셈입니다.

매튜의 집을 찾아간 AP 기자는 따뜻한 장면도 하나 전했습니다. 선천 전맹이 아니라 2024년 뇌종양으로 시신경을 잃은 다니엘 미얀(31세, 샌디에이고의 석사과정 학생)이 Bricks for the Blind 설명서를 따라 처음 조립한 것은 레고 장식품이었고, 결혼기념일에는 아내와 함께 레고 장미 세트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독립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 그게 자유예요. 저는 갑작스러운 실명 뒤에 ‘이제 뭘 못하게 될까’만 생각했는데 레고를 쌓으면서 ‘뭘 할 수 있을까’로 질문이 바뀌었어요.” 또 시각장애를 가진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이제 우리가 손주들에게 레고를 가르쳐 줄 수 있게 됐다”고 매튜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하네요.

알리는 이 이야기에서 제3호에서 소개한 Be My Eyes 재단이나 제4호의 Lighthouse Guild AI와 같은 결을 느낍니다. 당사자가 자신의 결핍을 자신을 넘어선 공동체의 문제로 확장하는 순간 세상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 레고라는 작고 가벼운 조각들이 한 사람의 유년 시절을 되찾아 주고, 나아가 누군가의 중년과 노년까지 다시 채워 주고 있다는 사실이 참 따뜻합니다.

레고 브랜드 이름에 담긴 뜻은 “Leg godt”, 덴마크어로 ‘잘 놀자(Play well)‘입니다. 이제 그 말에는 한 단어가 더 붙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Play well, together.”


마치며

이번 주 브리핑을 마치며 돌아보니 세상에는 두 종류의 힘이 같이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별을 인정하면서도 배상은 돌려주지 않는 제도의 벽, 법은 통과됐지만 본질은 외면된 현실, 그리고 설치율 43.5%가 말해 주는 숫자의 무게. 이런 무거움 한쪽에 국회에 모여 ‘처음부터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목소리, 손끝으로 4,000조각의 레고를 쌓아 올리는 청년의 이야기가 반대편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세상이 움직이지 않아요. 불편을 말하는 목소리와 가능성을 밀어 올리는 손이 함께 있을 때 접근성의 저울은 조금씩 수평을 찾아가는 법이니까요.

알리연구소에서 그 두 힘을 모두 진지하게 지켜보며 한 주 한 주 기록으로 남겨 나가겠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Footnotes

  1. 국립특수교육원이 김예지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 기준. 분권 형태 지급은 통권으로 된 정식 교과서를 한 번에 제공하지 못하고 일부 단원만 먼저 보내는 방식인데, 현장에서는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뒤늦게 분권 일부만 도착해 학습에 차질이 생기는 주된 원인으로 꼽힙니다. | 김예지 의원, 장애학생 교과서 ‘지각 공급’ 막는다 - 더인디고

  2. 단체 설립 시점은 자료에 따라 ‘2023년’(AP/Washington Times 기준)과 ‘2024년’(WBUR 인터뷰 기준)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매튜 시프린이 핀켈 씨와 함께 개별 설명서를 온라인에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부터이고, 비영리 법인 형태로 공식 출범한 시기는 2023~2024년 사이로 추정됩니다.